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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단상] 매운 맛 좀 보실래요?

- 김예명 관찰과상상력 대표-
2013. 07.25(목) 11:29확대축소
[김예명 관찰과상상력 대표. 칼럼니스트]
[김예명 관찰과상상력 대표] 그저 저녁 식사를 하러 갔을 뿐이다. 인근에 마땅히 들어갈 만한 식당이 없었고 차를 타면서까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저녁 식사를 너무 늦게 하고 싶지는 않은, 열혈 다이어트 실행자는 아니어도 체중 조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여자'이기에 눈에 보이는 그 식당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새로 개업한 식당의 분위기는 세련됐고 가격도 적당했다. 식당의 주 종목은 '매운 족발'. 아뿔싸, 매운 맛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는 잠시 망설였지만 갖가지 종합적인 이유를 안고 들어온 이 식당을 나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한 번 먹어나보자는 심사로 주문을 했다. 그러나 내심 그 매운 맛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은 떨쳐내지 못 했다고나 할까.


역시나 '매운 족발'은 몹시도 매웠다. 메뉴판을 보니 청양고추로 맛을 낸 족발이라고 했다. 한 번 슬쩍 맛을 본 후 나는 젓가락을 또 다시 갖다 대지 못 하고 전전긍긍, 친구는 기왕에 시킨 거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젓가락질을 하더니 이마와 눈가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매운 맛을 날리느라 '하~ 하~'하며 연신 입을 벌려 숨 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운 맛은 중독성이 있는지 잠시 주춤하던 젓가락이 다시 한 번 '매운 족발'로 다가갔고, 덩달아 술 생각이 나는 것이렸다. 술이 두 병째로 이어질 무렵 '매운 족발'은 우리의 입 속으로 모두 사라졌다. 두피가 저릿저릿해지면서 현기증도 살짝 일어나는 느낌이었으나, 술기운은 그 모든 불쾌한 증상을 견딜만하게 해줬다. 이후에 찾아온 증상은 반갑지 않은 격심한 두통.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그저 저녁 식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지 술을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매운 맛은 술을 불렀다. 술은 또 술을 부르고 노래방이라는 유흥을 생각나게 하고, 노래방엘 갔다면 또 다시 '입가심'이라는 명목으로 술을 먹게 될 수도 있었다. 이쯤 되면 매운 맛은 일종의 탈선이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매운 맛을 좋아하게 된 걸까? 애초에 우리의 식단은 맵고 짠 게 기본이긴 하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매운 맛은 매워도 너무 맵단 말이다. 그건 거의 자학의 수준이다. 한 때 매운 맛 열풍에 더욱 불을 지핀 보도도 많았다. 다이어트에 좋다든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아, 그렇지. 여기는 대한민국. 우리는 대한민국의 여자. 자고로 대한민국의 여자는 몸이 뚱뚱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좋다. 그렇다면 매운 맛을 먹어줘야겠군. 아, 또 있다. 우린 지금 극심한 불경기의 시대를 살고 있단 말이지. 대한민국의 '일개미'인 우리에게 불경기는 수입의 감소 내지는 직장의 인원 축소 불안을 유발하는 만큼 스트레스 관리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면 또 매운 맛을 안 먹을 수가 없는 거로군.


청소년 소설 중에 '이 일기는 읽지 마세요, 선생님'이라는 미국 작가의 책이 있다. 주인공 여자애는 폭력 남편과 그 앞에 억눌려 사는 엄마와 산다. 하루하루가 지옥인 이 아이는 학교 숙제로 일기를 쓰는 게 귀찮다. 특별한 일이랄 것도 없이 날마다 벌어지는 폭력과 불행 속에서 여자애가 일기에 쓸 수 있는 생활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일기장에 붙여주는 선생님의 말은 어느 새 이 아이에게 위로가 된다. 아이는 일기 쓰는 재미를 알게 되지만, 남이 알면 창피해서 비밀로 갖고 싶은 일은 '절대로 읽지 마세요.'라는 당부를 남긴다. 그건 결국 '꼭 봐 주세요.'의 다른 마음이고, 선생님도 그런 당부의 일기에는 아무런 글도 쓰지 않지만 아이는 안다. 선생님이 읽었다는 것을. 선생님이 읽어주어 고맙다는 것을.


읽는 내내 이 아이가 자기 인생의 매운 맛을 일기로 푸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만약 그 아이가 스트레스를 해소한답시고 매운 음식을 자주 먹었다면 위장은 상처요, 마음은 응어리일 뿐이니, 그 쌓인 인생의 고난들은 언제 어디선가 갑자기 분출돼 위험스러워질 수도 있다.


내 상처를 드러내는 건 그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알고 있다. 집단 심리 치유라는 것도 내면의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기 이야기를 함으로써 나의 내면을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처음엔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고 내 이야기를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지사지하는 순간 내 안의 응어리들은, 내 인생의 매운 맛들은 서서히 물러지고 순해진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런 방법들을 일반화하지 못 하는 미개한 상태인 것만 같다. 아이들에게 병영 캠프라는 방식으로 정신 무장을 시도하는 세상, 학교 폭력의 해결 방법들은 모두 닫아둔 채 사건 터지면 쉬쉬하기만 바쁜 세상,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개인적인 문제든 사회적인 문제든 인터넷에 올리는 순간 우르르 떼거리로 달려들어 초전박살을 내버리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오랜 독재 체제를 거쳐 온 나라답게 우리는 여전히 인생의 매운 맛 속에서 매운 맛 해법들만을 양산해내고 있다.


하지만 이제 매운 맛은 그만 안녕히 계세요, 사라져 주세요 인사하고 싶다. 그 매운 맛 먹어봐야 다이어트 효과는 잘 모르겠고, 스트레스 해소도 순간의 짧은 감각일 뿐이다. 매운 맛 자주 봐봐야 배우는 건 되풀이되는 매운 손 맛 뿐이다.


살림단상 글보기 http://blog.daum.net/yiwoosong/13483455
e-mail : munch-m@hanmail.net


한국타임즈 편집국 hktimes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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