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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집] 광주·전남 3.1혁명 재평가 '학술세미나' 개최

- "광주3.1혁명 재판기록 분석, 광주3.1혁명사 재정리 시급"
- 20일, '광주3.1혁명100주년학술세미나' 광주·전남·연해주 3.1혁명사 집중조명
- 양림동 기독교인들 사전모의에 '신문잡지종람소' 비밀단체 조직적 가담
2019. 02.19(화) 13:30확대축소
[사진설명 :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 모습(위 왼쪽), 학술세미나 안내 포스터(위 오른쪽), 노성태 수석교사(아래 왼쪽), 임선화 연구위원(전남대 5.18연구소, 아래 가운데), 김병학 연구위원(고려인 인문사회연구소, 아래 오른쪽)]
[학술세미나 안내 포스터]

- 숭일, 수피아, 광주농업 학생들과 양림동 교인들이 만세시위 주도
- 광주지역 첫 신문 '조선독립 광주신문' 대대적 배포, 투쟁정신 고취
- 광주지역 첫 시위장소, 시위행로 등 오류 수두룩, 광주시사 재정리 시급
- 연해주 고려인, 치열한 항일무장 독립투쟁과 국제적 연대투쟁 집중조명


[한국타임즈 김수경 기자] 광주3.1혁명의 새로운 사실들이 3.1혁명 주역 103명에 대한 재판기록 분석결과 드러났다. 노성태 수석교사(광주 국제고/역사)는 20일 열리는 '광주3.1혁명100주년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1919년 광주지역 3.1만세시위는 광주 양림동 기독교인들과 함께 2년 전 조직된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 청년학생들의 조직적 가담으로 치밀하게 준비돼 일어났으며, 4월 8일까지 광주 인근지역 횃불시위로 지속됐다"고 밝혔다.

광주 3.1혁명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103명의 연령과 직업, 거주지 등을 분석한 결과, 10∼20대 89명, 학생이 53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거주지는 양림교회와 숭일, 수피아학교, 기독교병원 등이 소재한 양림동이 62명으로 나타나 광주3.1혁명은 기독교인과 학생들이 주도하고, 여기에 농민과 상인, 이발사 등 다양한 계층이 폭넓게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광주제중원 직원 황상호 등이 항일투쟁의식을 고취하고,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는 내용의 광주지역 첫 신문 '조선독립광주신문'(4호까지 발행)을 만들어 시위현장에 집중 배포해 시위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성태 수석교사는 "판결문 기록으로 볼 때 광주지역 만세시위 사전준비모임 참가자 숫자와 광주지역 첫 시위장소, 시위행로, 재판형량 등에서 기존의 광주시사에 오류가 수두룩하게 발견돼 광주市史 중 3.1운동사에 대한 재정리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전남지역의 3.1 만세시위 규모가 다른 지역보다 크지 않았던 이유도 항일의병 전쟁의 중심지였던 전남지역에 대한 일제의 감시체제가 삼엄해 사전발각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란 주장도 제기됐다. 임선화 연구위원(전남대 5.18연구소)은 '전남지역 3.1운동의 재조명'이란 발제논문을 통해 "전남 동부지역은 천도교, 목포 등 서부지역은 기독교가 중심이 돼 만세시위가 벌어졌으나, 사전에 발각돼 무산된 사례가 많았다"며, "의병전쟁 결과 항일조직이 와해돼 만세시위 규모가 작았다는 기존의 학설은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병학 연구위원(고려인 인문사회연구소)은 '3.1운동과 연해주 고려인의 항일운동'에 대한 발제논문을 통해 "연해주 고려인들은 한반도의 3.1혁명에 고무돼, 3월17일 최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를 출범하고, 만세시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4개 언어로 번역해 세계만방에 알리면서 본격적으로 항일무장 독립투쟁에 나섰다"며 "정당한 평가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김병학 연구위원은 "광주와 연해주는 3.1혁명의 중심지란 점에서 일맥상통하고, 그런 점에서 광주고려인마을은 민족사를 연해주까지 확장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고려인 박물관'을 세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래에 이날 발표하는 학술세미나 발제요약문을 게재한다.

[노성태 수석교사(광주 국제고/역사) 발제 요약문]

광주3.1운동의 재구성 - 판결문을 중심으로


광주에서의 3‧1운동은 3월10일 만세시위 및 행진을 시작으로 4월8일까지 면 단위 횃불시위 및 광주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로까지 이어졌다. 양림동 기독교인과 비밀 독서모임이었던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뒤에 '삼합양조회'로 바뀜)인 젊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했지만, 숭일‧수피아‧농업학교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대규모 독립만세시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 3‧1운동의 전모를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숭일의 뿌리(1988)', '광주시사(1993)', '양림교회 90년사(1994)', '수피아 100년사(2008)', '광주‧전남 독립운동사적지1(2010)' 등 3‧1운동 관련 책자에 간략이 언급된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서술이 판결문 등을 참고한 새로운 연구 없이 광주 3·1운동의 주역 중 한분이었던 최한영의 회고를 정리한 1965년 '신동아' 3월호에 실린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라는 글을 '광주시사'에 그대로 실었고, 그리고 '광주시사'의 글을 다른 책들이 참고하면서 많은 오류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최한영의 회고담은 광주 3·1운동이 일어난 지 46년이 지난 시점에 쓰여 졌고, 또 회고에 의존하다보니 이름이나 날자, 형량, 최초 시위지, 시위 루트 등이 판결문의 내용과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광주시사'에는 3월6일 남궁혁 집 모의에 참석한 인물로 최병준, 황상호, 강석봉, 한길상, 최영균, 김용규, 최정두, 서정희, 김태열, 홍승애, 정상호, 김복수, 박팔준, 최한영, 강생기 등 15명으로 나온다. 그러나 판결문에는 김강, 김복현, 최병준, 송흥진,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김태열, 강석봉, 손인식 등 10명으로 차이가 난다.

'광주시사'에는 또 3년형을 선고받은 인물로 김철, 정상호, 범윤두, 김용규, 한길상, 최정두, 박일구, 김윤호, 이창호, 김태열, 김범수, 강석봉, 최병준, 김강, 최한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판결문을 보면 김윤호는 이윤호의 오기이며, 3년이 아닌 4개월을 선고받고 있고, 이창호는 6개월, 강석봉은 1.6년(광주지방법원 선고)을 선고 받고 있다. 심지어 정상호는 재판기록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이외에도 최초 시위지는 작은 장터가 아닌 광주교 밑 큰 장터였으며, 서문-충장로-충장로파출소-금남로-구법원 앞-광주경찰서의 행진 루트도 서문-충장로-북문밖-(다시)충장로-충장로우편국-광주경찰서였음이 확인됐다.

뿐만 아니라 재판을 받은 103명 중 대학생(2명), 숭일학교 학생(24명), 수피아 여학생(20명), 농업학교 학생(6명), 보통학교 학생(1명) 등 학생이 53명임을 확인했고, 50%이상이 학생임을 통해, 모의하고 준비한 것은 양림동 기독인들과 신문잡지종람소의 젊은 지식인이었지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부른 주역은 학생이었고, 그 정신은 10년 후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최한영의 회고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지만 판결문을 참고하지 않아 다소 오류가 있다. 따라서 아직 서훈되지 않은 43명의 서훈과 광주 3·1운동의 재서술을 통해 '광주시사'를 바로잡는 일이 매우 중요한 오늘의 과제다.

임선화 연구위원(전남대 5.18연구소) 발제 요약문

전남지역 3.1운동 재조명


전남지역의 3・1만세운동은 종교계가 주도했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었고, 전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주도했으며, 그 가운데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이끌었던 지역은 목포였다. 천도교가 중심이 된 지역은 대체로 전남 동부지역이었다. 기독교나 천도교는 중앙의 본부와 연락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선언서 등을 지방에 전달하기가 용이했고, 각 지방에서도 교인들끼리 상호 연락을 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하기가 쉬웠다.

아쉽게도 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일제의 감시체제가 그만큼 삼엄했음을 반증한다. 1910년 전후 전남지방은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의해 희생됐다. 이후 일제는 전남지방의 감시를 더욱 강화하였기에 3・1만세시위도 사전 발각된 경우가 많았다.

기존의 학설은 전남지방의 3・1만세운동이 다른 지방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지적과 함께, 이에 대한 이유로 시위 주도층이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으로 와해됐다고 봤다. 하지만 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만세시위의 주도층이 종교계였고, 특히 기독교는 동학농민전쟁이나 의병전쟁과 무관하였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의병전쟁으로 일제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김병학 연구위원(고려인 인문사회연구소) 발제 요약문

3.1운동과 연해주 고려인의 항일운동


한반도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은 연해주 고려인사회를 크게 고무시켰다. 이에 자극받은 연해주 고려인들은 3월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를 출범시키고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낭독했다. 고려인들은 독립선언서를 한국어,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4개 언어로 번역해 각 나라 영사관에 전달하고 일본영사관구내에도 뿌렸다.

만세운동의 물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해주를 거쳐 시베리아로 널리 퍼져나가 우수리스크, 스빠스크, 하바롭스크, 블라고베셴스크, 이루쿠츠크, 옴스크를 비롯한 여러 고려인 집거지에서 군중대회와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 집회에는 러시아인, 중국인, 그리고 연해주에 사는 여러 변방민족들도 참석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신문 '이즈베스찌야'는 1919년 7월11일자 1면에 어떻게 비무장한 조선의 만세운동참가자들이 식민주의자 정규군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웠는가에 대해 자세히 다뤘다.

같은 해 8월12일에는 모스크바 동방동맹건물에서 200여 명의 고려인이 모여 반일 군중집회를 열고 연해주와 한반도에서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고려인 전투부대와 임시중앙집행위원회를 즉시 만들어달라고 당국에 요구했다. 이듬해 3월1일에도 당시의 출판물들이 '3월1일은 혁명적 러시아 연해주의 명절이었다.'라고 지적할 정도로 큰 반일시위가 벌어졌으며, 여기에 러시아인 근로자들도 다수가 참가했다.

이처럼 3.1운동은 연해주로 건너가 피압박민족들 간의 국제적 연대로 이어졌고, 모스크바까지 확산돼 3.1운동의 세계적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연해주가 해외 최대 항일독립운동의 무대이자, 무장투쟁의 중심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연해주에는 적어도 11개 이상의 독립군 부대가 존재했고, 안중근, 홍범도, 이상설, 최재형과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고려인들의 항일 무장투쟁은 1922년 러시아에 의해 무장해제되므로써 중단됐고,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므로써 연해주 고려인 동포들은 처참한 희생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바로 이들의 후손들이 광주에 들어와 월곡동 일대에 '고려인마을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광주와 연해주는 3.1혁명의 중심지란 점에서 일맥상통하고, 그런 점에서 광주고려인마을은 민족사를 연해주까지 확장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재 광주에 고려인들의 희귀한 역사문화 유물, 자료들이 들어와 있으므로 '고려인 박물관'을 세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고려인 마을을 '광주의 명소, 광주의 미래'로 육성해야할 이유가 충분하다.

한국타임즈 김수경 기자 hktimes1@hanmail.net        한국타임즈 김수경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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