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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려인마을 사람들 인터뷰] '리가이 베라' 할머니가 말하는 "고려인, 고려인의 삶"

"가족들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어 안타까워"
2021. 01.04(월) 11:00확대축소
[가족이 함께 모였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 추억을 더 소중히 여길 텐데라고 말하는 안타까움과 추억을 간직한 사진들. 사진=광주고려인마을 제공]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진행자=이다리아) 나는 전화 녹음기로 이 인터뷰를 녹음했다. 이 인터뷰는 진실한 마음의 환담이 됐다. 나의 작은 고모할머니의 성함은 리가이 베라(Ligai Vera)라고 한다. 베라 할머니는 친할아버지의 여동생인데 한국에 와 있는 친척분은 이분 밖에 없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이미 살아 계시지 않으시니까, 우리 대가족의 역사를 베라 할머니께 물어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했다. 나는 친할아버지와 베라 할머니의 아버지인 나의 증조할아버지의 성함이 이금석(Lee Gyum Sek)이라고 알고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우리 가족 중에서 한글이름을 가진 마지막 분이셨다.

베라 할머니는 증조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고모할머니는 이렇게 인터뷰를 계속했다.

"나의 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토크 시의 파르티잔스키(Partizansky) 구역 출신이고, 나의 어머니는 보로쉴로브스키(Voroshilovsky) 구역 출신이란다. 그분의 형제들은 모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단다. 부모님의 맏딸인 타마라(Tamara) 큰 언니는 1948년에 태어났고, 너의 친할아버지인 그리샤(Grisha) 오빠는 1949년에 태어났지."

* 그럼, 베라 할머니는 어디서 태어나셨습니까?

- 난 키르기지아(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났지. 부모님이 일하는 곳에서 자식도 낳으셨으니까. 그래서 우리도 거기서 살았지.

* 그럼 증조할아버지하고 증조할머니는 어디서 일하셨습니까?

- 남들과 마찬가지로 콜호즈(농장)에서 일하셨지. 벼농사를 지으셨단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나는 소련 시절 고려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물어봤다. 베라 할머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대에서 고려인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 대신 고려인들은 노동군으로 동원돼 복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할아버지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고려인들이 이미 소련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이코누르 우주비행장 로켓부대에 복무하던 고려인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다고 한다.

나는 우리 가족이 워낙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경제적 형편이나 먹거리가 충분했는지, 그 당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아 베라 할머니에게 그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드렸다. 베라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미 동생들이 다 태어나 우리 가족 구성원으로 살고 있던 1950~1960년대에 우리는 자기 집을 가지고 있었단다. 어린 시절에 내가 살던 우리 지역은 경제적으로 괜찮았단다. 결코 못산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잘 살았고 필요한 것은 다 있었지.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은 어렸을 적에 먹을 것이 없는 시기를 겪으며 살기도 했단다. 고려인 조상들은 옛날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소련에 들어와서는 양파도 재배했지. 우리 아버지는 아주 정직하셨단다. 콜호즈(집단농장)에서는 분조장으로 일했단다. 아버지는 너무 정직해서 6개월 정도 감옥에 들어간 적도 있으셨지. 아버지가 직원들에게 월급을 분배해주고 직원들로부터 급여를 받았다는 확인 서명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지. 그 일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는 6개월쯤 감옥에 갇혀 있었단다. 아버지가 얼마나 정직하셨는지 알 수 있지.

- 작은 고모할머니 베라 할머니와 대가족 역사에 대해 진실한 대화 나눠 -
- 가족이 함께 모였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 추억을 더 소중히 여길텐데 -


* 그 당시에는 명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전통풍습을 지키셨나요? 그런 풍습이 많이 남아 있을까요?

- 우리는 우리 민족의 모든 풍습을 잘 지키려고 노력했단다. 명절 때면 주위의 이웃들이 우리 집에 모여서 놀았지. 우리집에는 시멘트로 만든 커다란 맷돌이 있었단다. 그 맷돌로 토요일마다 온 식구가 모여 두부를 만들었단다. 우리 어머니는 20킬로그램의 콩을 물에 불려 두었다가 그콩을 끓이셨지. 그 다음에는 우리가 두부를 만들었고. 두부를 만들면 온 시골 사람들이 그 두부를 먹으러 우리 집으로 찾아왔단다.

시골 사람들은 설날에도 우리 집을 자주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단다. 음력 1월 1일이 할아버지의 생신이기 때문이야. 나는 1월1일에 친척들이 모이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단다. 우리 집에 온 친척집 아이들은 모두 한 명씩 할아버지께 큰절(teri)로 인사를 드렸어. 그러면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세뱃돈을 주셨지. 우리 손주들까지도 내가 살던 우리 지역 어른들게 절을 올리고 세뱃돈을 받아봤단다. 그리고 설날이 다가오면 우리 가족들은 반드시 러시아식 만두인 뼬메니(pelmenyi)를 빚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

* 그럼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동전을 만두 하나 안에 넣어 복만두까지 빚으셨던건가요?

- 그렇지. 우리 아버지는 만두를 예쁘게 빚으셨거든. 그리고 만두를 빚는 방법도 우리와 달리 좀 특이했는데, 아마 그게 전통방식이었던 것 같아. 네가 한번 좀 상상해 보렴. 우리는 모두 8명이었어. 자식들만 말이야. 어머니는 혼자 만두 반죽을 하시고 우리는 모두 만두를 빚었지. 그뿐만 아니라 국수도 함께 만들었어. 우리 집에는 국수면을 빼는 국수틀까지 있었단다. 그 기계 안으로 반죽을 넣으면 밑에서 국수가 나와 바로 가마솥에 넣어 국수를 끓였지. 그리고 야채 재료도 다 손으로 자르거나 썰었지.

* 그럼 김치(짐치)는 사 먹지 않으셨나요?

- 우리는 김치도 10리터짜리 나무통에 소금물을 넣고 직접담가서 만들어 먹었단다. 요즘 한국 TV프로그램에서 한국의 시골 생활을 보면 내 머릿속에 그 당시 우리 삶의 모습과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떠오르더라. 그런 데 가서 다시 그렇게 살아 보고 싶더구나.

베라 할머니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침묵에 잠겼다. 나는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가 받은 교육에 대해 베라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어 질문을 던졌다.


* 베라 할머니, 증조부모님은 공부를 하셨나요? 학교는 몇 학년까지 다니셨나요?

-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7학년까지 교육을 받으셨는데 그 당 시에는 괜찮은 교육수준으로 여겨졌어. 증조할아버지는 고려말을 하실 줄도 알고 우리글을 쓰거나 읽으실 줄도 알고 계셨지. 증조할머니는 증조할아버지가 어디선가 고려말로 된 신문을 구해 집으로 가져와 계속 보셨다고 이야기하더구나. 참, 그런데 증조할머니의 학력은 야학을 다닌 것뿐이지. 네 할아버지의 아내인 네 친할머니는 상업대학을 졸업했단다. 그런데 그 당시 내 나이 또래 사람들 중에는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이가 많았고 대졸자는 별로 없었지. 내가 살던 지역 남자들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농사를 짓게 되었단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다가 코카서스(캅카즈)로 일하러 갔지.

* 어떻게 거기까지 가셨던가요?

- 일자리를 찾으러 그곳으로 갔는데 못 찾고 농사를 지었단다. 그 후에 우크라이나로 건너갔지. 어머니는 거기서도 집을 구해 살았는데 휴일마다 이웃들이 놀랄 정도로 대가족이 모여 논 적도 있다고 하시더라. 나도 그때 일이 기억 나는데 남자들은 화토나 카드를 치며 옛날이야기를 하더구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 추억을 더 소중히 여길텐데. 남자들은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처럼 가족들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힘들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구나.

마지막으로 베라 할머니는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셨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친구분을 잔치 때 우연히 만나셨다고 한다. 그 친구분은 증조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알아보셨는데 그분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증조할아버지와 같이 공부한 친구였다고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그 당시 약 17만3천 명의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는 한국에 오면 지금도 중앙아시아의 친척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예전에 여러 지역에서 함께 살았던 고려인들을 서로 만나는 일이 있다.

고려인인 우리는 지금도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미래를 위해 모국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이와같은 이야기는 우리 고려인들의 역사이자 우리가 겪은 일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 인터뷰 진행자 이다리야 양은 광주고려인마을 자녀 학교인 새날학교 고등반 3학년 재학중이다. 또한 이다리야 양은 2021년 대학입시에서 국민대학교와 한동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 합격해 미래고려인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꿈꾸고 있다.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sctm01@hanmail.net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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